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 30

요한이서,
문을 닫으라는
편지

“서로 사랑하자”고 쓰고 “집에 들이지 말라”고도 쓴
진리와 사랑이 함께 담긴 한 장짜리 편지

요한이서 1–13절
여는 글

요한이서는 신약에서 절 수가 가장 적은 책이에요. 열세 절이 전부예요. 학자들은 당시 파피루스 한 장에 딱 들어갈 만한 길이라고 말해요. 그런데 이 짧은 편지에 서로 반대처럼 들리는 두 부탁이 함께 들어 있어요. “서로 사랑하자”(5절)고 해 놓고, 몇 절 뒤에는 어떤 사람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10절)고 해요. 😄 사랑의 사도가 문을 닫으라니, 좀 의외지요.

하지만 이 편지를 천천히 읽으면, 요한에게 사랑과 진리는 서로 싸우는 말이 아니라 늘 손을 잡고 다니는 말이라는 걸 알게 돼요. 이름이 없는 “부녀”, 다섯 번 나오는 “진리”, 너무 앞서 나간 사람들, 종이와 먹 대신 얼굴을 보고 싶어 한 노사도까지, 짧은 편지에 숨은 이야기를 따라가 볼게요.

1부

요한이서는 어떤 책일까?

진리 안에서 사랑하라고 보낸 한 장짜리 편지

요한이서의 저자는 자기를 이름 대신 “장로”라고 소개해요(1절). 초대교회는 이 “장로”를 사도 요한으로 받아들였어요. 나이 많은 어른이자 교회의 지도자라는 뜻이 함께 담긴 호칭이에요. 기록 시기와 장소는 요한일서와 비슷하게 1세기 끝 무렵 에베소 근처로 봐요. 그때는 순회 전도자들이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전했고, 성도들은 그들을 집에 맞아들여 먹이고 재워 주었어요. 그런데 그중에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도 섞여 있었어요(7절). 요한은 한 교회에 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짧게 편지를 보내요.

“택하심을 받은 부녀”편지를 받는 사람은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1절)이에요. 실제 한 여성과 그 가족일 수도 있고, 한 지역 교회와 성도들을 부르는 표현일 수도 있어요. 2부 첫 장면에서 자세히 볼게요.
요한일서의 축소판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처음부터” 들은 말씀, 육체로 오신 예수님, 적그리스도, 충만한 기쁨… 요한일서의 핵심 단어들이 열세 절 안에 다 들어 있어요.

※ 2세기 초 파피아스의 글을 인용한 유세비우스는 사도 요한과 “장로 요한”을 구별해 읽었어요. 그래서 요한이서·삼서의 “장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어요. 이 글은 사도 요한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따랐어요.

요한이서의 큰 특징 다섯 가지
1
가장 적은 절 수
열세 절로, 신약에서 절 수가 가장 적은 책이에요.
2
“진리”로 가득한 인사
첫 네 절에 “진리”가 헬라어로 다섯 번 나와요.
3
사랑과 진리를 한 줄에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3절). 요한에게 둘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짝이에요.
4
문을 닫으라는 부탁
거짓 교사를 교회의 집에 들이지 말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요.
5
얼굴 보고 싶은 편지
쓸 것이 많지만 만나서 말하겠다며 서둘러 끝나요(12절).

요한이서의 중심에는 이 축복이 있어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3절). 요한은 “있기를 원하노라”가 아니라 “있으리라”라고 말해요. 우리가 진리를 지키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은혜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이미 우리에게 흘러오고 있기 때문이에요.

2부

더 깊이 숨은 7가지 장면

이름 없는 부녀부터 얼굴과 얼굴을 대할 날까지

1

“택하심을 받은 부녀”는
누구였을까

요한이서 1절 · 5절 · 13절 · 베드로전서 5:13 · 에베소서 5:25-27
한 여성으로 읽으면
믿음 좋은 어머니와 그 자녀들, 그리고 그 언니의 가족(13절)
VS
한 교회로 읽으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지역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이웃 교회

요한이서는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1절) 보낸 편지예요. “부녀”는 헬라어 퀴리아예요. “주님”을 뜻하는 “퀴리오스”의 여성형이라서, 우리말로 하면 “마님”, “귀부인” 정도의 존칭이에요. 그런데 이 부녀가 누구인지는 끝까지 나오지 않아요. 마지막 절도 이렇게 끝나요.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13절). 😄 이모네 조카들까지 안부를 전하는데, 정작 이름은 하나도 안 나와요.

그래서 옛날부터 두 가지로 읽어 왔어요. 하나는 실제로 믿음 좋은 한 여성과 그 가족에게 보낸 편지라는 거예요. 초대교회에서는 여성의 집이 교회의 모임 장소가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다른 하나는 “부녀”가 한 지역 교회를, “자녀들”이 그 교회 성도들을, “자매”가 이웃 교회를 가리킨다는 거예요.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르지요(엡 5:25-27).

두 번째 해석을 뒷받침하는 재밌는 구절이 있어요. 베드로전서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 없어요. 원문에는 “바벨론에 있는, 함께 택하심을 받은 여자”라고만 되어 있어요. 베드로도 교회를 “택하심 받은 여인”처럼 불렀던 거예요.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한 것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 받는 사람이 한 여성인지 교회인지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예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2-3세기)는 “엘렉타”라는 여성에게 보낸 편지로 보았다고 전해지지만, 오늘날에는 교회로 보는 학자들이 더 많아요.

돌아보기
내가 교회에 속한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내 선택보다 먼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기 때문임을 기억합니다.
2

네 절 안에
“진리”를 다섯 번 부른 인사

요한이서 1-4절 · 요한복음 14:6
1절“참으로(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요”
1절“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2절“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
3절“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4절“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이서의 인사말은 “진리”로 꽉 차 있어요. 헬라어로 알레테이아가 네 절 안에 다섯 번 나와요. 개역개정에서는 첫 번째를 “참으로”라고 옮겨서 네 번으로 보이지만, 원래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이에요. 😄 요한 할아버지가 “진리” 버튼을 연달아 누르신 것 같아요.

그런데 2절이 특별해요.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래요. 진리가 마치 사람처럼 우리 안에 살고, 우리와 함께 걸어요. 요한복음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 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아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요한에게 진리는 머리로 외우는 정답이 아니라 인격이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세요.

그래서 요한은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고 해요. 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유는 성격이 잘 맞아서가 아니라, 같은 진리 곧 같은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서예요. 그리고 요한이 가장 기뻐한 일은 “진리를 행하는” 자녀들을 보는 것이었어요(4절). 진리는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걸음으로 나타나요.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진리, 예수 그리스도예요.

돌아보기
진리를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오늘 한 걸음 진리를 행합니다.
3

사랑하면 계명, 계명하면 사랑,
요한의 돌림노래

요한이서 5-6절 · 요한복음 14:15 · 요한일서 5:3

5-6절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재밌어요. “서로 사랑하자…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랑이 뭐냐면 계명대로 사는 거고, 계명이 뭐냐면 사랑 가운데 사는 거래요. 😄 사랑에서 출발해 계명을 돌아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돌림노래 같아요.

이건 말장난이 아니라 요한이 예수님께 배운 거예요.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셨어요. 요한일서에서도 똑같이 말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사랑과 순종은 따로 떨어진 두 과목이 아니라, 한 동전의 앞뒷면이에요.

요즘은 사랑을 주로 “감정”으로 생각하지요. 그런데 요한은 사랑을 “걸어가는 것”(행하다)으로 말해요. 좋아하는 마음이 식은 날에도 계명을 따라 걸어가는 것,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리고 요한은 이 계명이 새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5절)이라고 해요. 새로운 비법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처음 들은 복음 안에 이미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이 다 들어 있어요.

돌아보기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 날에도 주님의 계명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사랑임을 기억하며, 오늘 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순종합니다.
4

성탄을 부인한 사람들,
“육체로 오심”

요한이서 7-8절 · 요한일서 4:2-3 · 요한복음 1:14

7절에서 편지의 분위기가 바뀌어요.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일서에서 만난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여기에 한 번 더 나와요.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오는 마지막 자리예요.

이 사람들이 부인한 것은 한마디로 “성탄”이었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이요. 그들 눈에는 거룩한 하나님이 먹고 자고 피곤해하는 몸을 입었다는 것이 격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보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영적인 존재”로만 만들고 싶어 했어요. 😄 좋게 말하면 예수님을 더 높여 드리려는 것 같지만, 실은 복음의 심장을 빼 버린 거예요.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진짜 몸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진짜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도 없고, 진짜 몸으로 부활하실 수도 없어요. 우리 죄를 대신 지실 참된 사람도 없게 되지요.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경고해요.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8절). 우리의 구원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요 1:14) 그 사건에 달려 있어요.

돌아보기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 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나를 위해 죽고 다시 사신 성탄과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로 고백합니다.
5

너무 “앞서 나간” 사람들

요한이서 9절 · 요한일서 2:24
앞서 나간 사람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VS
머무는 사람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9절의 “지나쳐”라는 말에 재밌는 뜻이 숨어 있어요. 헬라어 프로아고는 “앞서 가다, 앞질러 나가다”라는 뜻이에요. 거짓 교사들은 아마 자기들이 더 “앞서간” 사람이라고 자랑했을 거예요. 너희는 아직 초보 복음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는 더 깊고 새로운 진리를 안다고요. 😄 요즘 말로 하면 “우린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신앙이야” 하는 거예요.

요한은 그 말을 뒤집어요. 그리스도의 교훈을 넘어 앞서 나간 사람은 더 높이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린 거라고요. 반대로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모시고 있다고 해요. 요한이 좋아하는 단어 “거하다”(메노)가 여기서도 나와요. 머무르다, 떠나지 않고 살다라는 뜻이에요.

믿음의 성장은 복음을 졸업하고 다른 무언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같은 복음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거예요. 요한일서도 같은 말을 해요.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요일 2:24). 가장 깊은 신앙은 가장 새로운 신앙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은 그리스도 안에 끝까지 머무는 신앙이에요.

※ 거짓 교사들이 실제로 스스로를 “앞서간 사람”이라 불렀는지는 본문에서 추정한 것이에요. 9절의 이 단어는 사본에 따라 조금 다르게 전해지기도 해요.

돌아보기
새롭고 특별해 보이는 가르침에 끌리기보다, 처음 들은 복음 안에 머물며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 갑니다.
6

“집에 들이지도 말라”,
그 집은 교회였다

요한이서 10-11절 · 로마서 16:5 · 빌레몬서 1:2 · 「디다케」 11-12장

이제 가장 뜨거운 구절이에요.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10-11절). 사랑의 사도가 너무 차갑게 들리지요. 그런데 당시 사정을 알면 이 말이 달리 들려요.

첫째, 초대교회에는 예배당이 따로 없었어요. 성도의 집이 곧 교회였어요. 바울도 “저의 교회”(롬 16:5), “네 집에 있는 교회”(몬 1:2)라고 불렀지요. 그러니까 “집에 들인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손님 대접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모임에 세우고 강단을 내어 준다는 뜻이었어요. 둘째, 여기서 “인사”는 길에서 나누는 “안녕하세요”가 아니라, 떠나는 전도자를 축복하며 사역을 지지해 주는 인사에 가까워요.

초대교회는 순회 교사들 때문에 실제로 골치를 앓았어요.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에 쓰인 교회 지침서 「디다케」에는 이런 규칙이 있어요. 찾아온 사도는 하루, 필요하면 이틀 머물게 하되, 사흘을 머물면 거짓 선지자다. 떠날 때 빵 말고 돈을 달라고 하면 거짓 선지자다. 😄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 손님 계속 계실 건가?” 하고 눈치를 봤던 거예요.

그러니 요한의 말은 이웃에게 무례하게 굴라는 뜻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부인하는 가르침에 교회의 문과 강단을 내어 주지 말라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에요. 요한에게 참된 사랑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안전하게 머물도록 문을 지키는 것이었어요.

※ 「디다케」(열두 사도의 가르침)는 성경은 아니지만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는 귀한 문헌이에요. 정확한 기록 연대는 학자들 사이에 논의가 있어요.

돌아보기
누구에게나 친절하되,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가르침에는 내 마음과 교회의 문을 열어 주지 않도록 깨어 있습니다.
7

종이와 먹 대신
“입과 입으로”

요한이서 12-13절 · 민수기 12:8 · 고린도전서 13:12 · 요한계시록 22:4

요한이서는 이렇게 끝나요.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2절). 여기서 “종이”는 파피루스, “먹”은 검은 잉크를 가리켜요. 한 장짜리 편지가 꽉 차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 “할 말은 많은데 종이가 다 찼구나. 나머지는 얼굴 보고 하자.”

“대면하여”는 헬라어로 직역하면 “입과 입으로”예요. 이 표현이 구약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해요. 하나님이 모세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에요.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민 12:8). 히브리어로 이 말도 “입과 입으로”예요. 하나님이 가장 가까운 종과 나누신 대화 방식이, 노사도가 사랑하는 성도들과 나누고 싶은 대화 방식이었어요.

그리고 요한은 그 만남의 목적을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거라고 해요. 요한일서 첫머리(요일 1:4)와 똑같은 말이에요. 편지는 소중하지만, 얼굴을 보는 기쁨을 다 대신하지는 못해요.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성경 마지막 장은 이렇게 약속해요.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계 22:4). 지금 우리는 말씀이라는 편지로 주님을 만나지만, 언젠가 주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충만한 기쁨이 기다리고 있어요.

돌아보기
얼굴을 맞대고 함께 예배하는 교회의 기쁨을 감사하며, 주님의 얼굴을 뵐 그날을 기다립니다.
맺는 글
진리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진리도 아닌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요한이서는 한 장짜리 편지지만, 교회가 늘 붙들어야 할 균형을 보여 줘요. 서로 사랑하라는 부탁과 문을 지키라는 부탁이 한 편지 안에 함께 있어요. 진리를 지킨다며 차가워지는 것도, 사랑한다며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도 요한이 말하는 길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둘을 함께 붙들 수 있는 비결은 우리 안에 있지 않아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에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와서,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을 거예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3절)

※ 본문 인용은 개역개정을 기준으로 했습니다.